쿠란봉, N.S.W.
1898년 1월 12일
나는 주께서 자비롭게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고 계심을 기뻐한다. 그분께서 여러 번 오셨던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역사하셨던 것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떨린다. 그러나 즉각적인 효력이 지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들은 잊어버린바 되었다. 교만, 영적 냉담 등이 하늘에 기록되었다. 풍성한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로 방문을 받았던 자들은 불신으로 그들의 구속주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 8T 66.3
구주께서는 배틀크릭에서 자주 그대들을 방문하셨다. 구주께서는 낙심 중에 죽게 된 자들의 마음속에 영적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자 열망하면서 실지로 예루살렘의 거리를 걸어다니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오셨다. 그분의 임재와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치유의 선물로 그처럼 크게 축복을 받은 도시들이 그분을 거절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큰, 아니 보다 더 큰 짝사랑의 증거를 배틀크릭에서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와 축복을 당신의 교회에 풍성하게 주시지 않았던가? 그분께서는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고자 용서와 의의 기별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보내지 않으셨던가? 8T 67.1
예루살렘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빛 가운데서 걸어가기를 거절할 때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본이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진리를 맡은 자로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백성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탄원과 경고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그분의 권면을 존중하지 않았다. 성전 뜰은 매매와 약탈로 더러워졌다. 이기심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 질투와 투쟁이 간직되어 있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영역에서 이득을 구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어찌 너희를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8T 67.2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 우리의 교회들을 보시고, 우리의 교육 기관들을 보시고 슬퍼하고 우신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과 똑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배틀크릭에 조사를 하기 위하여 오신다. 출판사는 신성을 더럽히는 전당 (殿堂) 으로, 부정한 매매와 거래의 장소로 변하였다. 그것은 불공평과 사기가 이루어지는 곳, 이기심과 악의와 질투와 정욕이 주도권을 잡은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릇된 원칙에서 이런 일을 하도록 이끌려 온 자들은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경고와 간청이 그들에게 주어지면 그들은 “그가 비유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경고와 책망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취급되어 버렸다. 8T 67.3
그리스도께서 감람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셨을 때, 그분께서는 모든 교회 안에 이같은 상태가 존재하고 있은 것을 보셨다. 경고들은 그처럼 큰 빛을 받았던 예루살렘 백성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내려온다. 이 백성은 우리 앞에 하나의 경고로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함으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께서는 인간이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것 곧 배틀크릭에서 인간이 고안해 내고 있는 모든 것의 결과를 보신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 그분께서는 백성들의 죄가 회개를 느낄 수 없는 경계선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그들의 눈앞에 빛을 환하게 비추셨다. 그러나 공의롭고 의로운 원칙으로부터 떠나가는 긴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은 빛과 진리, 공의와 자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곳에 스스로를 두었다. 이 경로가 바로 그들의 본질의 부분이 되었다. 8T 68.1
나는 원칙에 있어서 그릇된 행동의 길에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결정적인 개혁을 이루고 그 후로는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 8T 68.2
이것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진리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대들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 18:21). 8T 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