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은 사치와 방탕에 잠겼고, 백성들과 위정자들 사이에는 신임이 거의 없었다. 정부의 모든 처사는 언제나 모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반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쳐서 루이 15세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처럼 악한 시대에 있어서도, 나태하고 경박하고 음란한 임금으로 유명하였다. 부패하고 잔악한 귀족 정치, 가난하고 무지한 하류 계급, 국가의 재정적 곤란과 백성들의 격분, 이 모든 것들은 선지자의 안목이 아닐지라도 무서운 사변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왕은 그의 신하들의 경고에 대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대로 버티고 나가 보자. 내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겠지”라고 언제나 대답하였다. 개혁의 필요를 아무리 역설하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왕은 죄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을 혁신시킬 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그의 나태하고 이기적인 대답, 곧 “재앙은 나의 죽은 뒤에”라는 말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는 프랑스의 운명을 여실히 표현한 것이었다. GC 280.1
로마교는 왕들과 지배 계급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두도록 영향을 미쳤다. 로마교는 이와 같이 하여 나라가 약화되면 백성들과 통치자들이 모두 자기의 지배 아래 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선견적 정책에 의하여 로마교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노예 상태가 되게 하려면 그들의 심령을 차꼬로 채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려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이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육체적 고통보다 천 배 이상 무서운 것은 도덕적 타락이었다. 성경은 박탈되었고, 고집과 이기적인 교훈으로 얽힌 백성들은 무지와 미신에 가려졌고, 악습에 빠져 버렸으므로 자제하기에 전연 부적당하게 되었다. GC 281.1
그러나 그 모든 결과로 생긴 일은 로마교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로마교는 자기의 교리를 맹종하는 대중을 만들기는커녕 그들을 이교도와 혁명가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로마교를 성직자의 정책이라고 멸시하였다. 그들은 성직자들을 그들을 압제하는 당파로 보았다. 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은 로마교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이 알았던 유일의 종교도 로마교의 교리였다. 그들은 로마교의 탐욕과 잔인성을 바로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성경을 전연 무용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GC 281.2
로마교가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고 그분의 율법을 왜곡시켜 버렸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를 동시에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가 성경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 맹종하기를 요구하였다. 거기에 반응하여 볼테르 (Voltaire) 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을 배척하고 무신론의 해독을 도처에 유포시켰다. 로마교는 그 쇠발굽으로 백성들을 짓밟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이 타락하고 사나워져서 로마교의 학정에 대하여 반발을 일으켜 모든 속박을 끊어버렸다. 그들이 그처럼 오랫동안 공경하여 왔던 것이 찬란하게 보이는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분노한 나머지 참 것과 거짓 것을 둘 다 거절하게 되었다. 그릇된 방종을 자유로 오해하여 그들은 그들이 생각한 자유 안에서 죄악의 노예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GC 281.3
혁명 초기에 왕의 양보로 백성측의 대표자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그리하여 세력의 균형에 있어서 백성측이 우세하였으나, 그들은 그 힘을 지혜롭고 적당하게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당한 비행을 고쳐 놓기에 급급한 그들은 사회의 개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분노한 대중들은 학대받아 온 분노와 잊혀지지 않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으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비참한 상태를 개혁하는 동시에 그들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들로 생각되는 계급에 대하여 보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압제받던 자들은 학정 아래서 배운 교훈을 실천하여 과거에 자기들을 압박하던 자들에게 똑같이 압제하게 되었다. GC 2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