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틴덜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죽은 자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였거나 하나님의 택하신 천사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음을 공언한다. 그것은 나의 신앙의 어떤 한 부분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육체의 부활에 관한 설교는 전혀 무익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William Tyndale, Preface to New Testa-ment (ed.1534).Reprinted in British Reformers — Tindale, Frith, Barnes, p.349]. GC 547.1
사람이 죽을 때에 불사 (不死) 의 축복을 받는다는 소망이 부활에 관한 성경상 교리를 일반적으로 등한히 하게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아담 클라크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부활의 교리는 오늘날보다 초대 교회가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왜 그런가? 사도들은 항상 부활에 대하여 주장하였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부활을 통하여 근면하고 순종하고 즐거워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런데 그들의 후계자들은 오늘날 그것을 좀처럼 말하고 있지 않는다. 사도들은 그렇게 설교하였고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전하면 우리의 청중들도 그렇게 믿게 될 것이다. 복음의 교리에서 이것처럼 중대한 교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강단에서 이것처럼 등한시되는 교리가 없다!” (Commentary, remarks on 1 Cor-inthians 15, par.3). GC 547.2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 마침내 영광스런 부활의 진리가 그리스도교계에서 거의 희미해지고 사라질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유명한 어떤 종교 저술가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18절에 있는 바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주해하고 있다. “의인들의 복스런 불멸의 교리는 의심스러운 주의 재림에 대한 교리를 대신하여 실제로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가 죽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것이 우리가 기다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이다. 죽은 자는 이미 영광중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심판과 축복을 고하는 나팔 소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GC 547.3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시려 할 때 그들이 미구에 당신께로 올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 3)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그 사실을 더욱 자세하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8).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부언한다. 이 위로의 말씀과 이미 인용한 보편 구제론을 믿는 목사의 말은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가! 그 목사는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그 죽은 자가 아무리 죄악적인 생애를 살아왔다 할지라도 그가 운명할 때 천사들에게 영접을 받는다는 말로 확신 있게 위로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형제들에게 알려 주고 그때에 무덤의 속박을 깨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GC 548.1
누구든지 그 복된 하늘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생애가 조사받고 그들의 품성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 통과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응을 받는다. 그 심판은 사람이 죽을 때에 받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말에 유의해 보라.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 17:31). 여기서 사도는 세계의 심판을 위한 특별한 때, 곧 미래의 어떤 때가 작정되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GC 548.2
동일한 기간에 대하여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 그리고 그는 다시 에녹의 말을 인용한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유 6, 14, 15). 요한은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 (계 20:12) 더라고 말한다. GC 548.3
만일 죽은 자들이 이미 하늘의 복락을 누리고 있거나, 혹은 지옥의 속에서 부르짖고 있다면 장래의 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런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은 애매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그 문제들은 보통의 두뇌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솔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 보급되어 있는 이런 교리에서 지혜와 공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의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거하다가 심판의 때에 그들의 사건을 조사받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는 명령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악인들은 고통의 장소에서 끌려나와 온 땅의 심판장에게 “저주를 받을 너희여 나를 떠나…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21, 41) 는 선고를 받게 되는가? 아,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대한 수치스런 모독이다. GC 549.1
영혼 불멸설은 로마교가 다신교에서 가져와 그리스도교로 들여보낸 거짓 교리들 중 하나였다. 마틴 루터는 그것을 “로마 법왕의 교령의 쓰레기더미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괴한 이야기” (E. Petavel,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5) 로 분류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죽은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한 말을 그 종교 개혁자는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죽은 자는 아무 감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의무도, 과학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솔로몬은 죽은 자가 잠을 자고 있으며 아무런 감각도 없다고 판단한다. 죽은 자들은 일단 누우면 날이나 해가 가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깨어날 때에 그들은 잠깐 동안 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Martin Luther, Exposition of Solomon’s Book Called Ecclesiastes, p.152). GC 5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