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교도들은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무덤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증오심은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 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T.Fuller, Church History of Britain, b.4, sec.2, par.54). 그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 (John Huss) 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그 사업은 보헤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GC 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