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후스의 절친한 친우가 된 프라하 출신의 제롬 (Jerome) 이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으로 개종한 영국 왕후는 원래 보헤미아의 공주였으므로, 그의 감화로 말미암아 보헤미아에는 개혁자의 저술이 널리 유포되었다. 후스는 그러한 저술들을 흥미 있게 읽었다. 그는 그 저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으며 위클리프가 주장하는 개혁주의에 찬동하게 되었다. 비록 후스 자신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때에 그는 그를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인도할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GC 99.2
그 때에 프라하에 영국으로부터 학식 있는 두 사람이 왔다. 그들은 진리의 밝은 빛을 받았는데,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이렇게 먼 지방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법왕의 최상권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으므로 즉시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목적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한 가지의 계책을 세웠다. 그들은 본래 설교자인 동시에 화가였으므로 그들의 기술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이었는데, 그분께서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마 21:5) 타셨다. 제자들은 여행으로 더러워진 헌 옷을 입고 맨발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법왕의 행렬을 그린 것인데, 법왕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아름답게 장식한 말을 타고 있으며, 그 앞에는 나팔수들이 가고 있었고, 뒤에는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GC 99.3
그것은 참으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주목을 끈 무언의 설교였다. 군중들이 몰려와서 그 두 장의 그림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 그림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주되시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그리고 그분의 종이라고 자칭하는 법왕의 자고와 교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라하에는 큰 동요가 생겼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얼마 후에 그 곳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교훈은 잊히지 않았다. 특별히 그 그림은 후스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인상을 주었으므로 그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를 더욱 세밀히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 위클리프의 개혁설을 모두 받아들일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법왕교의 진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으므로 타는 듯한 열성으로 교권의 부패와 교만과 야심을 규탄하였다. GC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