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후에 다른 법왕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전과 같이 군대와 자금이 법왕권 하에 있는 온 유럽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이 위험한 일에 가담시키고자 권유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리 가증한 죄를 범하여도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이 보증되었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하늘에서의 큰 상이 약속되었고 살아남는 자들은 그 전쟁터에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되었다. 다시금 대군이 징모되어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그 대군 앞에서 퇴각하여 침략자들을 국내로 깊숙이 유인하여 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이미 승리한 줄로 생각하게 하였다. 드디어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퇴각을 정지하고, 원수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십자군은 그제야 그들의 실책을 깨닫고, 군대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적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적군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일반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어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의 총지휘자인 법왕의 사절은 공포감에 눌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자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마침내 그 자신도 도망하는 무리들에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당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갔다. GC 116.3
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받고 무장한 무리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대군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 군대를 도망하게 하시며, 하룻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수신 하나님께서 억압자의 세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 번 펴셨던 것이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 53:5). GC 117.1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드디어 권모술수 (權謀術數) 를 쓰게 되었다. 표면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실지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주는 타협책을 쓰게 되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모든 교인들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각각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성직자가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제외되는 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 등이었다. 드디어 법왕측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법왕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Wylie, b.3, ch.18). 이러한 조건 아래 조약은 맺어지고, 로마는 투쟁으로 얻지 못한 것을 허위와 사기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조문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GC 118.1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이 생기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고상한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의 자유는 없어졌다. GC 118.2
후스와 제롬을 배반한 시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보헤미아인의 권리를 옹호하겠노라고 한 자신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법왕권의 확립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추종하므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20년간의 그의 생애는 수고와 위험으로 충만하였다. 오랫동안의 쓸데없는 전투로 그의 군대는 쇠잔하여졌고, 그의 재물은 고갈되었다. 그는 1년을 통치한 후에 국가를 내란 일보 직전에 버려둔 채 불명예로 낙인찍힌 이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죽었다. GC 1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