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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증언 1 -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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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수

    아래의 기록된 ‘페이지’는 영문 페이지입니다.1T 713.1

    특정한 증언들이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엘렌G.화잇 저서 출판관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은 주 (註) 를 붙이게 되었다. 1T 713.2

    116페이지.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 — 약 10년간에 걸쳐, 안식일 준수자들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 안식일을 지켰다. 죠셉 베이츠 목사는 1846년에 출판한 네째 계명의 안식일의 영원성이라는 그의 최초의 소책자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의 비유를 인용하였는데, 그들 중 마지막 무리에 속한 자들은 “십일시” 에 부름을 받아 한 시간만 일을 했다. 그런데, 일꾼들의 삯은 “저물” 때 지불했다 (마 20:6, 8, 12). 이 구절과,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요 11:9) 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질문과를 비교하여, 그는, 성력 (聖曆) 의 시작인 춘분 시로 계산하면 “저녁” 은 제12시, 곧 오늘날 6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결론을 더 이상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중요한 이유는, 그의 나이와 경험과 경건한 생애 등을 존중해 왔기 때문인 것 같다. 1T 713.3

    시간이 경과하고, 기별이 전파되고, 안식일 준수자들의 수가 증가되어감에 따라, 그렇게 실천되어 오는 것을 의심하게 되고 안식일의 시작을 나타내는 일몰 시간에 대하여 변론이 생겼다. J.N.앤드루스 목사가 그 문제에 대하여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일몰 시간이 더 합당하다는 성경상 근거를 제시하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가 1855년 11월 17일 미시간주 배틀크릭 총회에서 안식일에 관한 문제로 거론되고 토의되었다. 그 결과로, 거기에 참석한 사람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앤드루스 목사의 결론이 옳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2일 후에 주어진 이상을 통하여 화잇 부인에게 이 문제가 제시됨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의문들이 해답되었고, 믿는 사람들을 일치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새로운 가르침을 소개하기보다는 성경 연구에서 얻은 결론을 확증해 주는 것이 이상의 역할이라고 설명하면서, 제임스 화잇 목사는 후에 이렇게 논평했다. 1T 713.4

    “만일, 이상이 실수하는 자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면, 왜 화잇 자매는 여섯시의 잘못을 즉시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잘못을 당신 자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시기에 고쳐 주심으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 불행한 분열이 존재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심에 대하여 늘 감사해 왔다. 그러나, 사랑하는 독자여, 이 점에 있어서의 주님의 역사는 영적 선물을 통하여 주어진 올바른 견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님의 종들이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성경상 문제들을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문제에 관하여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에 굳게 섰지만, 어떤 사람들이 이 문제 때문에 단체와 조화를 이루는데서 벗어날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거기에 따른 적절한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분의 영의 선물의 표현을 통하여 그분의 선하심을 나타내실 절호의 시기였던 것이다” (1868년 2월25일, 리뷰 앤드 헤랄드).1T 713.5

    116, 117, 122, 123페이지. “메신저” 파 — 1854년 여름에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자들 가운데서 최초의 불만과 반역이 나타났다. 기별을 전하고 있던 두 사람이 거칠고 비판적인 정신과, 탐욕과, 손에 들어온 재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의 낭비 때문에 예언의 신을 통하여 책망을 받았다. 회개하는 대신에 분개하게 된 그들은 다른 몇 사람들과 연합하여 화잇 목사 부부와 다른 지도자들을 부당하게 헐뜯고 그들에 대하여 거짓 비난을 했다. 비록 안식일 진리를 계속적으로 옹호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진리의 사자” 라고 부르는 비방하는 출판물을 내기 시작했다. 1T 714.1

    위스콘신 주의 스티븐슨 목사와 헐 목사도 그들과 연합했다. 이 사람들은 제일일 재림교 (first-day Adventist) 전도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셋째 천사의 기별의 진리를 받아들였노라고 공언하면서도 “미래 천년설” 에 관한 교리를 계속해서 지지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일천 년 기간 동안에 구원을 위한 “두번째 기회” 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리뷰” 지가 그것을 반대하는 기사만 내지 않을 것 같으면 이 문제를 옹호하지 않고 기별을 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본문에 지적된 바와같이, 그들은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고 곧 “리뷰” 지와 그 지지자들을 반대하게 되었다. 1T 714.2

    이와 같은 “진리의 반대자들” 의 활동은 곧 종언을 고했다. 스티븐슨과 헐 목사는 둘 다 그들의 이성을 잃었다. “진리의 사자” 는 1857년에 출판이 중단되었다. 화잇 목사는 1858년 초에, 그 파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한때 그 파에 속해 있노라고 자랑했던 18명의 신자들 중 한 사람도 지금은 공적인 간증을 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그들의 정규 집회는 한 곳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1858년 1월 14일, 리뷰 앤드 헤랄드). 1T 714.3

    190페이지. 조직적 헌금 제도 — 기별이 전해진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확신에 못이겨 새로 발견한 진리를 전하러 나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노동이나 신자들이 자원해서 바치는 헌금에 의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와 같은 불확실한 방법은 다소간에 우발적이요 유동적이었다. 1859년 초에, 좀더 확실한 계획의 필요를 느끼고 그 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연구의 결과로 조직적 헌금 제도라고 부르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과 조화를 이루어 주일 중 첫째 날에 바치는 것이 장려되고, 고린도후서 8장 12-14절에 제안된 바에 따라 재정적 책임을 공정하게 분담하는 것이 또한 장려되었다. 그 계획은, 형제들에게는 매주 5내지 25센트, 자매들은 2내지 10센트를 저축하고, 재산 소유자들에게는 매 100불에 해당되는 재산마다 매주 1내지 5센트씩 바치도록 요구했다. 1T 714.4

    이 계획은 일반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졌고, 한편 예언의 신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교회 안에 있는 가장 큰 죄는 탐심으로 지적되었다 (194페이지). 조직적 헌금 제도는 완전한 계획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시고” 그들을 “성장시키고 계신다” 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191페이지). 사업과 목회를 지지하기 위한 계획이 넓어져 감에 따라 헌금의 정신은 점점 더 장려되고, 마침내 성경을 통하여 주어진 빛이 오늘날 교회에서 알려진 바와 같은 십일금과 헌금의 제도를 알려 주게 되었다.1T 715.1

    210페이지. 조직 — 1860년이 되기까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는 재단이나 교회의 조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채택된 명칭도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흩어진 무리” , “적은 남은 무리” 혹은 그런 비슷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제, 화잇 목사는 리뷰 앤드 헤랄드 사에 빌려 준 돈에 대하여 개인적인 책임을 계속해서 질 수 없다고 리뷰 지를 통하여 발표했다. 그는 또한 “이 백성들이 교회의 재산을 보험에 가입시키고, 그들이 집회에 사용하는 건물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소유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유언장을 만들거나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출판 사업에 한몫을 충당시킬 수 있는 때가 곧 와야 한다는 소원을 피력했다.” 그는 이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 가 위에 열거한 유리한 조건들을 얻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 제안해 달라고 형제들에게 요청했다. 1T 715.2

    이 요청에 대하여 처음으로 반응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관련하여 B 형제가 보낸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법률에 따라 하나의 종교단체로 법인을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 마치 바벨탑의 건축자들이 의도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이름을 내” 는 것이 될 것이며, “바벨론의 기초에 놓여 있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회하는 건물들의 보험 가입에 대하여는, 그것들이 주님의 재산이 아니었던가, 주님께서는 보험 회사의 도움 없이 당신의 재산을 돌봐 주실 수 없을 것인가? 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출판소에 돈을 빌려 주는 자들이 재단 법인에서 서명한 증서를 받고자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 빌려 주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주님을 신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1860년 2월 23일, 3월 22일, 리뷰 앤드 헤랄드. 1T 715.3

    많은 토론을 거친 후에 출판소를 합법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대체로 극복되었으며, 마침내 1860년 9월에 열린 총회에서 재림 리뷰 출판 협회가 조직되었다. 몇 달 후에는 그 명칭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출판 협회로 바뀌었다. 이런 절차를 밟은 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 조직에 착수하는 일을 싫어하여 계속적으로 토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직에 찬동함으로 일이 진척되어, 처음에는 교회들을 조직하고, 그 다음에는 주 (州) 의 합회들을, 마지막으로 1863년에는 대총회를 조직하였다. 1T 715.4

    “조직” 에 관한 증언 (270-272페이지) 은 이 운동과 그것에 관하여 주어진 이상과 관련하여 뉴욕 주에서 당한 반대에 대하여 말해 준다. 1T 715.5

    292페이지. — 마술사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큰 기만자의 도움을 받은 요술에 의하여 그들은 그런 모습이 나타나게 할 수 있었다. 지팡이를 산 뱀으로 만드는 것은 사단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악의 왕이 비록 타락한 천사의 모든 지혜와 힘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생명을 창조하거나 줄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절대권이다. 그러나, 사단의 힘으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그는 했다. 그는 가짜를 만들어 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다. 바로와 그의 궁전에서는 그렇게 된 것으로 믿었다. 외관상으로는 그것들을 모세와 아론이 만든 뱀과 구별할 길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증언은 성경의 언어로 그것에 대하여 말한다. 동시에, 동일한 영께서는 성경이 그 상황에 나타난 그대로를 말해준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증언 5권 33호 696-698페이지를 참조하라 (영문).1T 716.1

    355페이지. 반역 — 이 증언이 기록될 당시인 1863년 초에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국가는 전쟁 중이었다. 비록 마음으로는 비전투원이지만 교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정부와 함께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편에 속해 있었다. 싸움이 진전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남자들이 군대에 소집당했다. 소집이 있을 때마다, 모든 지역에서는 특정한 수의 신병을 응소시키도록 책임이 지워졌다. 그런데, 지원 입대가 할당된 숫자보다 적을 때에는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명단이 작성되었다. 얼마 동안은 돈을 지불하여 대리자를 삼으로 작성된 명단에서 빠질 수가 있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을 비전투원으로 복무하게 하는 조치도 없고, 안식일 준수에 대한 허락도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자들이 소집당하면 대개 이런 모양으로 돈을 내고 면제되었다. 만일, 돈을 지불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는 그런 목적으로 지출된 자금에 의하여 도움을 받았다. 1T 716.2

    이제 더 많은 병사들이 필요하게 되고, 전과 같은 면제의 특전이 없이 국가의 징집법의 시행이 임박하게 되자, 우리의 형제들은 무장을 하거나 안식일에 일을 하도록 강요될 그런 징집에 응하는 일 때문에 난처해졌다. 1T 716.3

    이 증언이 발표되기 몇 개월 전에 화잇 목사는, 356페이지에 언급되어있는 바와같이 “국가” 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써서 “리뷰 앤드 헤랄드” 지에 게재했다. 그는 정부가 지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며 의로운 일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 당시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권면은, 징집당하는 일에 있어서 “거역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다. 1T 716.4

    “군법에 회부되어 총살당하기까지 거역하는 자는 너무 지나친 감이 있으며, 자살의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862년 8월 12일, 리뷰 앤드 헤랄드). 1T 716.5

    이 기사에 따른 편지들 중 어떤 것들의 내용은 화잇 부인이 지적한 바와같이, 화잇 목사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제기된 “안식일을 범한 것과 살인” 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항의하도록 이끈 그런 것들이었다. 이런 극단자들이 한편으로는 화잇 부인에 의하여 책망을 받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경고의 말이 입대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주어졌다.1T 716.6

    1864년 7월에 국가의 징집법이 개정되어, 300불 면제 구절을 취소하게 되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젊은이들에게는, 양심적으로 무장을 반대한 종단원 (宗團員) 들에게 허락된 특전을 얻을 수 있는 조치가 즉시 취해져서, 병원에서의 비전투 업무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보호 등의 일이 맡겨졌다. 심각한 위기가 이르기 전에 이런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몇 가지 경우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징집당하여 병원의 업무나 그 밖의 비전투 업무를 맡았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들의 빛을 비추고자 노력했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정규적으로 군인들에게 분급하는 문서 구입을 위한 군 전도지 (軍傳道紙) 자금에 대한 영수 목록이 “리뷰 앤드 헤랄드” 의 컬럼을 통하여 게재되었다. 1T 717.1

    남북전쟁과 관련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비전투원으로서의 신분을 인정받는 조치를 취하게 하였고,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권세” (롬 13:1) 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상 명령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 1T 717.2

    421, 456페이지. 의복의 개혁 — 이것이 기록될 당시 (1863·1867년) 미국의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입은 의복은 건강에 매우 해로운 것이었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길고, 코르셋에 의하여 허리를 압축하고, 또한 엉덩이에 의하여 지탱되는 무거운 치마의 무게 등을 이유로 반대할 만한 것들이었다. 약 10년 전에, 국가적으로 탁월한 몇 사람의 여인들이 이처럼 심각한 결함에서 벗어난 새 스타일의 의복을 채택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새 의복의 형태는 남녀들이 다 같이 입는 터키식 의복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운동이 너무 보편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한동안 “의복의 개혁” 에 대한 회의가 매년 개최되었다. 1T 717.3

    화잇 부인이 여기에서 말한 “미국식 의복” 은 초창기의 스타일을 수정하여 뉴욕 주 댄스빌의 하리엣 오스틴 박사가 지지한 것이었다. 그것은 “엉덩이에서 무릎 중간쯤 오는” 짧은 치마와, 남자처럼 보이게 하는 바지, 코트, 조끼등을 겸해서 입는 것이었다 (465페이지 참조). 1864년에 화잇 부인이 본 “이른바 의복의 개혁” 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적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1T 717.4

    1865년에 화잇 부인은 “생활의 방법” 지 6호를 통하여, 우리의 자매들에게 얌전하고 건강에 좋은 스타일의 의복을 입도록 호소했다. 이듬해 배틀크릭에서 새로 열린 건강 개혁원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극단적으로 짧은 미국식 의복이나 지나치게 길고 무거운 의복을 고치는 형태의 의복을 고안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1T 717.5

    1867년 증언 11호에 “의복의 개혁” 이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기사가 실렸다 (456-466페이지). 여기서 의복 문제가 충분히 검토되고, 더 한층 자세한 권면이 주어졌다. 화잇 부인에게 나타난 원칙들을 구체화 시킨 한 일반적 형태가 추천되었고, 그것이 “짧은 의복의 개혁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그의 이상 가운데 나타난 독특한 형태는 없었지만, 그 후에 그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T 717.6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바로 그 형태가 모든 사람이 적용해야 할 그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고, 이와 같이 단순한 어떤 것은 우리가 환경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의복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지침이 될 정확한 법칙으로서의 하나의 정확한 스타일이 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 1897년 화잇 부인의 편지 19, 우리의 건강 기별의 이야기 145페이지에서 인용. 1T 718.1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널리 유행되어 있던 여인들의 의복은 더 좋은 면으로 바뀌어져서, 더한층 분별 있고 건전한 것이 되었다. 정확한 형태를 지적한 구식 의복 건강 개혁은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이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지침이 되어야 할 기본적 원칙에 관하여 화잇 부인이 주장한 균일한 증언이 언제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897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1T 718.2

    “우리의 자매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입는 것처럼 검소하게 옷을 입게 하고, 훌륭한 질로 된 의복, 질기고 수수하고 이 시대에 적합한 옷을 입게 하라. 그리고, 의복 문제로 골몰하지 않도록 하라” (상게서, 146). 1T 718.3

    525페이지 — 의복 문제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독자에게는, 교회증언4권 30호에 기록된 “의복의 단순성” 이라는 기사가 도움이 된다. 1T 718.4

    689페이지 — 여러 주에서 종교 서적 보급회가 조직된 이래, 합당한 가난한 자들에게 서적과 소책자를 공급하는 일은 그 보급회들이 담당했다. 여기에 언급된 출판물들 중 어떤 것들은 오늘날 절판되었다. 1T 718.5

    엘렌G.화잇 저서 출판관리위원회 1T 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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