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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의 대쟁투 -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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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를 드러낸 베르캥

    고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들은 비천하고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왕궁과 훌륭한 저택 가운데도 재물과 지위와 심지어는 생명까지라도 진리에 비하면 경하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감독의 예복을 입고 감독의 관을 쓴 자보다도 왕의 갑옷을 입은 자들이 한층 더 고상하고 고결하고 확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드 베르캥 (Louis de Berquin) 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예의바른 기사였고, 학구열이 투철하고, 세련된 행동과 흠이 없는 도덕적 표준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법왕 제도의 신봉자요 미사에 참석하고 설교를 열심으로 듣는 자였으며,…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루터파를 미워하는 생각이 더욱 많았다”고 한 저자는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로마교의 교리가 아니라 루터의 교리인 것을 깨닫고” (Wylie, b.13, ch.9) 놀랐다. 그는 그 뒤로부터 온전히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GC 215.3

    “프랑스 귀족 가운데서 최대의 학자”인 그는 그의 천품 (天稟) 과 웅변적 재능, 백절불굴의 용기와 열심,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서 궁전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보아서 천성적으로 프랑스 개혁자로 태어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베자 (Beza) 는 “만일 프란시스 1세가 제2의 선후 (選侯) 였었더라면 베르캥은 분명히 제2의 루터가 되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법왕교도들은 그를 “루터보다 더욱 나쁜 사람이다” (Wylie, b.13, ch.9) 고 부르짖었다. 그는 프랑스의 로마교도들에게는 정말로 루터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이단자로 투옥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왕은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다. 로마교와 개혁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프란시스 왕은 승려 측의 가혹한 열성을 묵인하는 듯하다가도 때로는 그것을 견제하였다. 베르캥은 법왕교의 당국자들에 의하여 세 번이나 투옥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천재적 재질과 고결한 인격을 찬탄해 오던 왕은 그를 교권의 술책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때마다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GC 216.1

    베르캥은 프랑스에서 그를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고, 또는 자진해서 망명하므로 안전하게 된 사람들의 본을 따르라는 권고를 자주 들었다. 모든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서도 진리를 위하여 생명과 명예를 버릴 기백이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인 에라스무스 (Erasmus) 는 베르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어떤 외국의 대사로 파견되기를 요청하여 독일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베다 (Beda) 를 알 것입니다. 그는 널리 사방으로 독소 (毒素) 를 퍼뜨리는 수천의 머리를 가진 괴물입니다. 그대의 원수는 참으로 많소이다. 그대의 사업이 그리스도의 사업보다 더욱 훌륭할지라도 그들은 그대를 잔혹한 죽음에 처하기 전에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보호에 지나치게 의뢰하지 마십시오. 하여간 신학부의 교사들과 나에게 누가 미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Wylie, b.13, ch.9). GC 216.2

    그러나 위험이 증가될수록 베르캥의 열심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정책적이요, 기회주의적인 권고에 복종하기는커녕 도리어 한층 더 대담한 수단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공격할 것이었다. 그는 로마교가 자기에게 씌우고자 하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도리어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적극적이요, 무서운 반대자는 파리 시와 불란서 전국을 통하여 종교상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고 있는 파리 대학 신학부의 박사들과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베르캥은 그 박사들의 저서 중에서 12개의 조목을 뽑아서 “성경에 위배되고 이단적인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왕에게 그 논쟁의 심판자가 되어 주기를 호소하였다.GC 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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