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쟁은 다른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였으나 그것은 “개혁자측에 어떠한 계층과 사람이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밝히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무식한 무리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종파심이 강렬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전연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사람들이었고, 성경이 공급해 주는 무기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그들은 시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 비텐베르크, 취리히 등과 같은 훌륭한 중심지, 혹은 루터, 멜란히톤, 츠빙글리, 에콜람파디우스 같은 인물들에만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그와 같이 주도적 역할을 한 장소나 인물들에게만 큰 능력과 수확을 기대하고 그 외의 장소나 사람들은 별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스웨덴의 무대로 눈을 돌려 올라프와 라우렌티우스 같은 미미한 이름, 곧 스승들에게서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한 번 훑어보자.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학자와 신학자, 복음의 진리의 전 체계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 궤변학파의 학자들과 로마교의 주교들을 쉽게 정복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Wylie, b.10, ch.4). GC 243.3
그 논쟁의 결과로 스웨덴의 왕은 개혁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얼마 후에 국회가 개혁주의에 대하여 찬성의 뜻을 선언하였다. 신약 성경은 올라프 페트리에 의하여 스웨덴어로 번역되었으며, 왕의 희망에 따라 그 두 형제는 성경 전편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리하여 스웨덴의 국민들은 비로소 자기 나라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또 국회는 성직에 있는 사람들이 국내의 어느 곳에서나 성경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성경 읽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GC 244.1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실히 무지와 미신의 암흑은 복된 복음의 빛으로 말미암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로마교의 압박에서 해방된 그 나라는 지금까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힘과 위대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스웨덴은 개신교의 한 보루가 되었다. 1세기 후 비상한 위험이 다가왔을 때, 스웨덴은 일개의 작은 나라일지라도 30년 전쟁의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있는 유럽에서 독일을 구원한 유럽에서의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온 북유럽이 다시 로마교의 학정 아래 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러자 스웨덴의 군대 때문에 독일은 법왕교의 횡포를 물리치고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루터교도와 칼빈파를 위하여 신교의 자유를 갖게 되었고,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에도 종교 자유를 회복시켰다. GC 2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