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지옥설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 마시우고 있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거짓 교리 중 하나이다 (계 14:8, 17:2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이단설을 받아들이고 거룩한 단에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마치 거짓 안식일을 로마교에서 받은 것처럼 그것도 로마교로부터 받았다.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받은 빛은 우리가 받은 빛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시대에 주어진 빛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비치는 빛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버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가르쳤다는 이유로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바벨론에 선고된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는 바벨론의 가증한 독주를 마시게 된다. GC 536.3
또한 영원 지옥설을 반대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므로 그분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이 근본적으로 불멸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인류는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두려운 경고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고자 위협하는 것이며 글자 그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비록 이기적 쾌락을 계속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할지라도 최후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만 생각하고 그분의 공의를 무시하기 때문에 육신적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기에 담대하게 해준다. GC 537.1
보편 구제설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데는 그들 자신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즉사한 믿지 않는 청년의 장례식에서 보편 구제설을 믿는 한 목사는 다윗에 관하여 쓴 성경절, 곧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 13:39) 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GC 537.2
그 설교자는 말하였다. “나는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난 자, 혹 술취한 상태에서 죽은 자, 범죄로 새빨갛게 물든 그들의 두루마기를 씻지 못한 채 죽은 자, 이 청년처럼 아직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믿음의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만족을 얻는다. 성경이 이 두려운 문제에 관하여 답을 해주기 때문이다. 암논은 참으로 죄를 많이 지었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술주정뱅이로 술에 취한 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는 암논이 내세에서 좋은 일을 당할 것인지 나쁜 일을 당할 것인지 길흉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그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 13:39). GC 537.3
이 말에서 어떤 결론을 추리할 수 있는가? 영원한 고통이란 다윗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보편적인 순결과 평안에 관한 더욱 기쁘고 더욱 광명하고 더욱 박애적인 가설 (假說) 을 지지하는 당당한 논증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 왜 그러했던가? 그는 예언적 안목으로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보고 그 아들이 온갖 시험에서 벗어나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죄악적 부패에서 순화되고 완전히 거룩하고 지혜롭게 된 후, 이미 승천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영혼들의 무리에 가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죄와 괴로움의 현 상태에서 놓여나서 성령의 거룩한 입김이 그의 어두워진 영혼에 내어 뿜겨질 곳으로 가서 그의 영혼이 하늘의 지혜와 영원한 사랑의 즐거움으로 일깨움을 받고 품성의 성화를 얻어 하늘 거민들의 안식과 교제를 같이 나누는 데 있었다. GC 538.1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늘의 구원이 우리가 이생에서 행한 일에 전혀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현재의 심적 변화나 신앙이나 신앙 고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GC 5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