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 루터가 대학 교수로서 놀랄 만한 공적을 남긴 사실을 알았다. 개혁자가 교회의 문에 그의 논제를 제시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제성제 (諸聖祭) 축제 때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는 현저히 감소되었다. 로마의 예배자들과 연금 액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리는 비텐베르크를 찾아온 다른 계급의 사람들로 채워졌는데, 그들은 유물 예배 (遺物禮拜) 를 위하여 온 순례자들이 아니고, 대학의 교실을 채우는 학생들이었다. 루터의 저서는 각처에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일으켜 주었으므로 독일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비텐베르크를 처음으로 바라보는 청년들은 “손을 들고 마치 옛날에 시온에서 했던 것처럼 이 성에서 진리의 빛이 비치게 하시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까지 그 빛을 전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D’Aubigne, b.4, ch.10). GC 139.1
루터는 아직도 로마의 오류에서 부분적으로 돌아선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경을 법왕의 교서와 법전 (法典) 에 비교해 볼 때 그의 마음은 놀라움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법왕의 교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나는 법왕이 적그리스도인지 그분의 사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교서에서 그리스도를 너무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D’Aubigne, b.5, ch.1). 그 당시에 루터는 여전히 로마교의 지지자였으며, 교회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아니하였다. GC 139.2
루터의 저서와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으로 퍼져갔다. 개혁의 사업은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도 일어났다. 그의 저서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도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그의 교훈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벨기에와 이탈리아에도 진리가 전파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듯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신앙생활의 희망과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GC 139.3
루터의 공격으로 로마는 더욱더 격노하게 되었으며, 그를 반대하는 광신적인 어떤 사람들, 심지어 가톨릭 대학교의 박사들까지도 그 반역적인 승려를 죽이는 자는 범죄하는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루는 어떤 수상한 자가 권총을 외투 속에 감추고 그 개혁자에게 가까이 와서, 어찌하여 그대는 혼자 다니느냐고 물었다. 루터는 “나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그분은 나의 힘이요 방패시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대답하였다 (D’Au-bigne, b.6, ch.2). 이 말을 듣고 그 수상한 자는 얼굴빛이 창백하게 되었으며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피하듯이 도망하여 버렸다. GC 140.1
로마는 루터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방패가 되셨다. 그의 교리는 “민가와 수도원과…귀족의 저택과 대학과 왕의 궁전 등으로 전하여져서 도처로 퍼졌다” (D’Au-bigne, b.6, ch.2). 귀족들은 그의 운동을 원조하기 위하여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GC 140.2
바로 그 즈음 루터는 후스의 저서를 읽고, 자신이 주장하고 가르치고자 하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큰 진리가 벌써 보헤미아의 개혁자로 말미암아 주장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루터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후스의 신봉자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계속해서 “일세기 전에 전파된 진리를 불태워 버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받고야 말 것이다” (Wylie, b.6, ch.1) 고 말하였다. GC 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