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엘렌 화잇이 논제를 명확히 함
사도 바울은 말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믿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외관상 사람의 헌신과 경건과 성화의 부족은 우리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데서 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계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FW 15.1
한 계층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곡해하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밝혀진 조건과 일치되기를 등한히 한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믿고 순종하노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에게 새로운 빛,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비췬 귀중한 빛의 광선들과 반대되는 위치에 스스로를 두는 자들 측에도 충분하게 동일한 큰 오류가 있다. 먼저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보지 못한다. 나중 부류의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더 중한 것, 곧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등한히 한다. FW 15.2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놀라운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 이해의 눈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한편으로 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켰고, 그런가 하면 우리 역시 다른 관점에서 거의 동일한 일을 해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위대한 구속의 계획의 완전한 의미를 백성들 앞에서 지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무시해 버리고, 이론과 논리를 도입하여 논쟁적인 설교를 해 왔다.FW 15.3
개심하지 않은 자들이 단 위에 서서 설교해 왔다. 그들의 마음은 살아있고, 매어달리고, 신뢰하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감격의 증거를 결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모든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에 대해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쳐다볼 때 그대는 십자가를 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이다. 세상의 구속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세상의 구주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쳐다보고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마음이 녹아지고 깨어져서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FW 16.1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 요지(要旨)가 충분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을 통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확신하고 완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진정한 사슬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그대의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라. “주님, 나는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구속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셨다면 나는 거기에 응답하겠습니다. 나의 생명과 그 모든 가능성을 바치고 나의 모든 연약함을 당신의 보호에 맡기는 바입니다.” FW 16.2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 마음과 정신의 밀실을 비추는 빛의 줄기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빛을 어둠이라고 부르고 어둠을 빛이라고 부르는 편견으로 가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빛이 심령의 밀실들을 모두 채우게 될 때 하늘에서 오는 빛은 환영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율이 된다. FW 16.3